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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병권 (Goh Byeong-gwon), Research Space Suyu+Nomo, Seoul
오 선민 (Oh Sun Min), Research Space Suyu+Nomo, Seoul

내이션 이전의 인터내셔널
「월남망국사」 의 조선어 번역에 대하여
International vor national
Über koreanische Übersetzungen von Vietnams Ruin (1907)

vorgestellt von Yun Bee

고병권•오선민(코뮤넷 수유너머)

1. 번역과 내이션, 그리고 인터내셔널

근대 ‘내이션(국민, nation)’의 탄생에 번역이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건 이제 그다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번역에 대한 통상적인 표상, 즉 번역은 두 개의 언어공동체를 매개하는 일이라는 생각은 무엇보다 매개되어야 할 각각의 공동체를 상정하게 한다. 번역가능한 혹은 번역불가능한 언어공동체들의 차이는 오직 번역의 결과로 나타나지만, 우리는 곧잘 그 차이들을 번역 이전으로 소급하고, 그것을 각 공동체들의 고유성으로 간주한다.

번역의 표상은 두 언어공동체의 등가성과 고유성을 동시에 승인한다. 마치 상품교환이 교환가치의 등가성과 사용가치의 상이성을 동시에 말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번역의 표상을 통해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식으로 서로 닮아가는 공동체들을 보게 된다. 사카이 나오키가 ‘쌍형상화(cofiguration) [1]

보통 ‘근대 계몽기’로 불리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이르는 짧은 시기 동안 조선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서양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조선에도 ‘국문(國文)’, ‘인민(人民)’, ‘국체(國體)’ 개념이 생겨났다. 특히 유학생과 관리들의 견문록이나 시찰보고 등은 조선이 새로 발견하거나 창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었다. 조선은 번역된 서양의 이미지에 따라 자신을 단장해갔다. 자신만의 국기(國旗)를 만들고, 자신만의 국어(國語)를 갖고, 자신만의 국사(國史)를 교육했지만, 그것은 모두 남들처럼 되기 위해서였다.

자기를 발견하는 일이 남을 닮는 일이고, 그 과정이 서구화(그리고 일본화)되는 길이었다는 점에서 이 번역 과정은 상당이 위계화된 것이기도 했다. 황호덕은 근대 계몽기 조선에서 ‘국어’ 내지 ‘국문’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내이션의 독립과 식민화의 경향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음을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자신의 ‘쓰기’를 정당화하는 입론은 자국화나 탈식민화의 작업인데, 그 ‘쓰기’의 양식 자체는 식민화 혹은 외국화에 근접해 있다.” [2] [3] [4]

하지만 번역이 내셔널리즘과 보편주의, 제국주의 질서를 낳았다고 할 수 있을까. 번역에 대한 표상이 그런 것들을 가능케 한 것은 사실이지만, 번역 자체를 고려해보면 그것이 내이션의 동일성을 오히려 위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역자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거나 기존의 말에 무언가를 덧붙이지 않고서는 말을 옮기는 데 성공할 수 없다. 외부의 이질적 요소를 도입하는 방식은 이질적인 외부 요소를 내부에서 창출하는 과정과 같다. 번역의 반복은 공동체의 자기동일성을 강화하기는커녕 그것을 더 큰 불안정성으로 몰고 간다.

사실 이런 불안정성은 번역할 때마다 번역자 자신이 경험하는 일이다. 번역자는 정체성 자체가 분열된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는 ‘나’, ‘당신’, ‘그’라는 말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거나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저자와 독자, 발표자와 청중 사이에서, 쓰거나 말하지만 저자나 발표자가 아니고, 읽거나 묻지만 독자나 청중이 아니다. 사카이의 표현을 빌면 그는 특정한 인칭을 부여받을 수 없는 “내적으로 분열되고 복수화되어 있는” “환승적 주체”라고 할 수 있다. [5]

벤야민은 “번역자는 원작의 언어에 갇혀 있는 순수언어(die reine Sprache)를 번역자 자신의 언어를 통해 해방시키고, 또한 순수언어를 위해 자기 언어의 낡은 장벽을 무너뜨린다.”고 했다. [6]

번역이 균질적인 개별 언어공동체의 불가능성을 입증하는 실천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실천을 ‛내이션’의 불가능성, ‘내이션’이라는 표상의 해체와 관련지을 수 있지 않을까. 번역이 우리에게 모든 개별 언어들 곁에는 전달불가능한 말이 있음을, 은폐되거나 상징적인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어떤 ‘불가능’이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면, 그것은 또한 ‘내이션’의 불가능성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번역은 ‘내’ 안에, ‘우리’ 안에, 나와 우리로 환원되지 않는 타자들이 함께 있음을 말해주지 않는가. 순수언어만큼이나 순수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이번 컨퍼런스에서 우리는 번역이 일깨우는 이런 공동체, 이러한 코뮨의 가능성을 ‘인터내셔널’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우리는 물론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고 외쳤던 맑스와 엥겔스의 ‘인터내셔널’을 염두에 두고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은 그 프롤레타리아가 이미 ‘조국을 상실한 존재’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즉 인터내셔널은 내이션들의 국제적 연대가 아니라, 내이션의 해체를 통한 연대이다.

이는 가령 프랑스 혁명 직전 출간된 시에예스((E.J. Sieyès)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1789)에서 드러난 내셔널리즘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7] ’으로 규정하고, [8] [9] [10]

하지만 인터내셔널은 ‘프랑스의 알제리인들’이 사라지는 것을 고대하는 게 아니라, 그 존재를 긍정하고 구성하려는 사유이다. 시에예스는 전쟁을 상상케 함으로써 외국인들을 몰아내려 했지만, 가령 1871년의 파리코뮨은 시이예스가 상상한 그런 상황에서 “한 독일 노동자를 노동 장관에 앉혔고”, “폴란드의 영웅적 아들들에게 파리 수비대의 지휘를 맡겼다.” [11]

확실히 ‘프랑스-알제리인’, ‘프랑스-독일인’, ‘일본-조선인’ [12] [13] 근대 사회에서 표상불가능한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들은 프랑스인으로도 알제리인으로도, 일본인으로도 조선인으로도, 한국인으로도 네팔인으로도 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종의 ‘사이-존재(ëtre-entre)’이고 [14] [15]

오늘 우리는 1906-7년 사이 조선에 번역된 하나의 텍스트, 『월남망국사』에서 제국주의와 내셔널리즘에 대항하는 인터내셔널의 가능성을 읽어보려 한다. 당시 조선은 ‘을사보호조약 ’(1905)을 통해 외교권을 박탈당한 직후였고, ‘망국’이 현실적 가능성으로 체감되던 때였다. 이제 막 형성되고 있던 근대적 ‘국권’과 ‘국민’ 개념은 그 상실의 위협 속에서 더 강력하게 조선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조선인들은 박탈과 상실의 체험 속에서 오히려 자신이 과거에 ‘가지고 있었던 것’, 그래서 반드시 ‘되찾아야 할 것’으로서 ‘내이션’을 더 강하게 상상했다. 그 때 프랑스에 의한 월남의 식민화를 다룬 『월남망국사』의 번역은 조선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는 내셔널리즘으로, 더 나아가 지역주의[유럽과 아시아], 인종주의[백인종과 황인종]로 포획될 위험이 다분했고, 실제로 상당 부분 그렇게 통용된 이 텍스트에서, 그것을 저지하고 해체하는 어떤 가능성을 생각해보고 싶다. 우리는 조선에서 내셔널리즘이 형성되기 이전에, 혹은 형성되는 과정에 그것의 해체의 실천 내지 해체의 가능성도 존재했다고 말하고 싶다.

2. 『 월남망국사 』 의 조선어 번역

『월남망국사』는 월남의 판보이쩌우(潘佩珠, Phan Boi Chau)와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 Liang Ch'i Ch'ao)가 1905년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나눈 대담을 상하이 광지서국(廣智書局)에서 펴낸 책이다. 당시 량치차오는 무술변법(戊戌變法)(1898)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 중이었다. 그는 요코하마의 중국인 거류지에 머물면서 많은 저술을 남겼고 활발한 출판활동을 벌였다. [16] [17]

이 둘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판보이쩌우는 이미 캉유웨이(K'ang Yu Wei, 康有爲), 량치차오와 같은 중국 개혁파들의 글을 읽었고, 일본에서 근대화 모델을 발견한 그들의 생각에도 공감했던 터였다. 홍콩에서 그는 량치차오가 일본에 머무르고 있다는 걸 듣고는 요코하마를 향했다. 그리고는 도착하자마자 량치차오에게 편지를 보내 만남을 청하였고 이후 안내인의 통역과 필담을 통해 장시간 대담을 나누었다. [18]

량치차오는 이 대담을 『월남망국사』라는 이름으로 편찬해냈다. 하지만 사실 본 내용의 상당부분은 량치차오의 권유를 받아 판보이쩌우가 작성했다. 량치차오는 ‘월남의 장래’를 다룬 본문 일부를 작성했고, 월남과 청나라, 프랑스의 외교관계를 정리해서 부록으로 붙였다. 본문 내용은 월남이 프랑스에 의해 패망하게 된 사연, 월남에서 일어난 반프랑스 저항운동, 프랑스의 가혹한 식민지 통치, 월남의 장래 등을 담고 있다.

월남과 중국의 망명객이 신흥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는 일본에서 나눈 대담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가던 조선에 곧바로 전해졌다. 1900년대 초반에 이미 조선의 제물포에 량치차오가 발행한 《신민총보》의 판매처가 있었고, 요코하마와 제물포, 상하이를 잇는 정기 여객선이 있었기 때문에, 하루 이틀만 지나면 조선의 독자들도 거기서 나온 글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월남망국사』의 일부 내용은 1905년에 이미 조선의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되었고, 1906년에는 《황성신문》이 본문을 국한문으로 번역하여 「讀越南亡國史」라는 제목으로 연재하였다. 이 연재가 시작될 즈음에 《대한매일신보》에 광고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상하이 광지서국(廣智書局)의 원본은 조선에서 이미 상당수 유통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

번역 단행본은 조선의 중국통역관[漢語 譯官] 출신인 현채(玄采) [20]

그러나 어떻든 조선어 번역본의 바탕은 현채본이었다. 현채본은 상하이 광지서국에서 나온 『越南亡國史』와 비교했을 때, 량치차오의 서문, 「월남망국사전록(越南亡國史前錄)」, 본문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를 그대로 수용했고, 부록만 「월남소지(越南小志)」 대신 「월법양국교섭(越法兩國交涉)」, 「멸국신법론(滅國新法論)」, 「일본지조선(日本之朝鮮)」, 「월남제독유영복격문(越南提督劉永福檄文)」 등을 붙였다. 현채는 1907년 5월 재간본을 내는데, 이때는 「월남제독유영복격문」이 빠진다. [21]

이상익본이 내용의 요약 및 생략이 조금 큰 편이기는 하지만, 어떻든 세 개의 번역본에서 눈에 두드러진 것은 내용보다는 문체이다. 세 번역본의 머리말 부분만을 잠깐 살펴도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현채본) 年月日에飮氷室主人、梁啓超가丈室에獨坐야日本有賀長雄氏의滿洲委任統治論을讀忽然히一人이入謁고幷히一書進니...

주시경본) 하로는 음빙실 쥬인 량계초가 한방에 혼자안자셔 일본사람 유하쟝웅씨의 만쥬통치론을 보더니 홀연히 한사람이 (들어와  한권을 내게 주니)...

이상익본) 모년모월모일에、쳥귝사람、음빙실쥬인양계초가、집에홀로안졌더니、홀연히、사람이드러와、글을주어뵈이는지라、

현채본은 기본적으로 한문에 한글로 토를 단 한문현토체이지만, 부사 등을 한글로 옮기는 등 국한문체형식도 취하고 있다. [22] [23]

하지만 이 세 개의 번역본들은 어떤 일정한 방향성을 견지하고 있다. 비록 짧은 시차이기는 하지만 현채본에서 이상익본으로 갈수록 독자를 확대하는 문체가 시도되고 있다. 한문 원서를 읽을 수 없는 이들을 위하여 국한문본[현채본]과 국문본[주시경]이 나왔고, 아예 순국문조차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낭독에 적합한 구연본[이상익]이 나온 것처럼 보인다. 결국 『월남망국사』는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까지 독자로 끌어들이고 있다고 하겠다. 본래의 텍스트가 망국의 현실에 비분강개한 판보이쩌우의 말을 글로 옮긴 것이라면, 이 글은 몇 차례의 번역을 거쳐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더 나아가 망국의 위험에 처한 국가의 목소리로 변화되었다. 적어도 이 책을 옮기고 번역한 사람들은 분명 그런 의도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4]

조선에서 이 책의 반향은 실로 대단했다. 현채본은 간행된 지 6개월 만에 재판이 출간되고, 곧이어 교사용 책자 『幼年必讀釋義』에 다시 실렸다. 『幼年必讀』이 당시 대부분의 사립학교에서 사용한 교과서였음을 생각할 때 『월남망국사』의 내용은 초등학생들에게도 전해졌으리라 생각된다. [25]

번역본 전체의 판매량을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이 책의 영향력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특히 조선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국채보상운동’과 이 책은 관계가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현채본이 나온 다음해(1907) 2월부터 전개되었는데 그 취지서에 월남과 같이 됨을 피하기 위해 이 운동을 전개한다고 밝히고 있다. [26] 『월남망국사』의 조선어 역자인 현채 자신이 이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또 다른 역자인 이상익과 이상익본의 교열자이자 현채의 아들인 현공렴(玄公廉)도 서울에서 이 운동을 전개했다. 아마도 이상익과 현공렴은 국채보상운동을 부녀자와 학생들까지 포함하는 전국민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낭독하기 편한 순국문본 발간을 추진했던 것 같다. [27]

조선에 친일정부가 들어서고 사실상 한일병합(1910)이 임박하면서 『월남망국사』는 조선 최초의 근대적 금서들의 목록 [28] 『월남망국사』는 832책, 또 『월남망국사』가 실린 『유년필독석의』의 하(下)편이 312책으로 전체 1144책에 이른다. 하지만 금서조치에도 불구하고 『월남망국사』는 은밀한 형태로 여러 사람들에게 읽혔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사람들은 기존 판본과는 다른 『월남망국사』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기존 번역본들을 재가공한 다른 형태의 번역본들이 지하에서 꽤 많이 유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9] [30]

3. 환승 중에 이루어진 합승

요컨대 『월남망국사』의 조선어 번역본은 강력한 내셔널리즘 운동에 활용되었다. 번역자들 의 뜻도 그러했고 실제로 그런 효과를 내기도 했다. 조선인에게 월남은 연대의 대상이기보다는 경계해야 할 ‘반면교사’였다. 판보이쩌우의 목소리는 ‘함께 싸우자’보다는 ‘우리처럼 되지 말라’는 것으로 들렸다. 이 책을 소개한 신문도, 이 책의 번역자들도 한결같이 그렇게 말했다. 월남처럼 되지 않으려면 강한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망국의 위협이 강할수록 강한 민족, 강한 나라에 대한 열망이 커져갔다.

사실 이런 열망은 『월남망국사』를 편찬한 량치차오의 것이기도 했다. 그는 서문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세계에 공평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오직 강권뿐이다.” 이는 한편으로 힘을 내세우는 제국주의의 부당함을 고발한 것이지만, 또한 자신이 가진 약육강식의 세계인식을 투영한 것이기도 했다.

판보이쩌우 역시 량치차오처럼, ‘현명하고 강한 인종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인종은 도태된다’는 식의 사회진화론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가 량치차오를 만나기 전 월남에서 펴낸 『유구혈루신서(琉球血淚新書)』(1904)는 일본에 병합된 류큐인들(the Ryukyus)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여기서 나라 잃은 백성의 운명이 어떤 것인지를 월남인들에게 들려준다. 그러나 그는 류큐인들에 대해 연민을 보이면서도 일본을 비난하지 않는다. [31] [32] 『월남망국사』가 조선에서 번역되고 소개된 맥락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의 번역자들은 일본에 저항하면서도 그 힘에 대한 선망을 가지고 있었고, 월남인들에게는 동정하면서도 거리를 두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책의 번역본에 번역자 자신도 의도하지 않는, 아니 저자들도 의도하지 않는 어떤 가능성이 만들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번역본의 사전 의도나 사후 용도와는 달리 번역본 자체가 구성되는 과정에 주목할 때 그렇다. 더 많은 언어를 횡단해갈수록, 그리고 더 많이 번역될수록, 더 많은 곳으로 퍼져나갈수록, 『월남망국사』에는 원본을 능가하는 어떤 가치증식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번역자들의 개입 흔적이다. 우리는 텍스트들에서 번역자들이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자기 목소리는 아니지만 그들은 묘한 방식으로 말을 추가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월남망국사』의 조선어 번역본[현채본과 주시경본]은 대체로 원본에 대한 충실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주 예외적인 부분이 있다. 번역자 현채는 아무런 표시도 없이 원본에 있는 글인 것처럼 두 쪽 분량의 내용을 삽입해놓았다. [33]

번역자가 삽입한 내용은 량치차오가 판보이쩌우에게 조선이 제2의 월남의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고 말한 곳 바로 뒤에 이어진다. 1904년과 1905년 사이에 조선에서 일어난 일을 현채는 량치차오의 대사인 양 처리하고 있다.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조선인들의 전국적 배일운동, 일본군의 서울 장악, 집회의 전면적 금지, 언론 검열. 그리고 조선의 내정을 개혁한다는 미명 아래 이루어진 외교권, 군정권, 재정권의 박탈. 거기에 차관을 제공하는 형식으로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막대한 채무를 지게 하는 것. 량치차오는 판보이쩌우에게 이는 영국이 이집트를 식민지화할 때 한 일이라고 통탄해 한다. 월남이나 이집트의 운명이 조선에도 닥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은 앞서 지적했듯이 원본 『월남망국사』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량치차오 자신의 말이기는 하다. 량치차오의 책 『조선망국사략(朝鮮亡國史略)』에 실린 「조선위일본지조선(朝鮮爲日本之朝鮮)」이라는 글 이곳저곳에서 현채가 발췌해서 여기에 옮겨 넣은 것이기 때문이다. [34]

통상적인 번역의 잣대, 즉 원본을 정확히 옮겨야 한다는 의미에서 보면 이는 큰 왜곡이자 부당한 개입이다. 번역자가 원작에 인위적으로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애당초 번역자는 말을 하지만 화자가 아니고, 말을 듣지만 청자가 아니다. 그는 다만 환승 중인 주체일 뿐이다. 그런데 조선의 번역본에서는 갑자기 합승이 일어난다. 책에는 본래 저자의 목소리 이외의 목소리는 담길 수가 없다. 하지만 조선의 번역자들은 저자의 목소리를 빌어, 저자의 말로써 자기 소리를 내고 있다.

일반적 번역의 잣대로는 말도 안 되는 역자의 개입을, 그러나 이 책은 허용하는 것처럼 보 인다. 이 책은 프랑스에 대한 월남의 고발 옆에, 일본에 대한 조선의 고발이 들어서는 것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본래 원본 자체가 일종의 번역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량치차오는 판보이쩌우의 월남이야기를 번역하고, 판보이쩌우는 량치차오의 생각을 번역하고 있다. 실제로 이들은 『월남망국사』를 중국의 독자들과 월남의 독자들에게 보냈다. [35]

조선의 번역자는 여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더했다고 할 수 있다. 현채가 새로 밀어 넣은 량치차오의 문장은 “此所謂朝鮮滅亡史라”로 끝난다. 현채는 『월남망국사』 안에 량치차오의 입을 빌어 ‘조선멸망사’를 집어넣은 셈이다. 이로써 『월남망국사』의 모든 문장은 한편으로는 저자의 목소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자와 역자가 함께 내는 목소리이고, 한편으로는 ‘월남망국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월남-조선망국사’가 되었다.

이 책에는 제국주의의 침탈을 고발하는 월남, 청, 조선의 목소리가 들어 있고, 그것이 또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것, 그럼으로써 또 다른 목소리가 탑승하는 것을 환영하고 있다. 번역 과정에서 원본에 부당하게 탑승한 일은 원본을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지만, 그 훼손이 여기서는 어쩌면 원작에서 의도된 것을 더 잘 구현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의도된 것을 우리가 ‘반제국주의 인터내셔널’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텍스트의 운명이 저자의 운명과 같아야 할 이유는 없다. 설령 판보이쩌우나 량치차오, 현채 등이 자기 나라가 세계의 강대국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말을 하고 글을 옮겼다 해도, 이 텍스트 자체는 제국주의에 고통받는 이들, 제국주의를 고발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함께 담아내고 있다. 책을 펴낸 의도는 ‘월남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 텍스트는 청나라, 조선, 이집트 등이 월남의 다른 얼굴들임을, 그들의 목소리가 월남의 다양한 목소리임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환승’ 중에 일어나는 이러한 ‘합승’은 특별한 일이기보다는 번역할 때마다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인지 모른다. 우리가 좀처럼 알아차리기 어렵다할지라도, 번역은 ‘환승’이면서 또 ‘합승’일 수밖에 없다. 어떤 텍스트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나아갈 때, 어떤 이질성을 탑승시키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월남망국사』의 조선어 번역본처럼 탑승의 흔적이 가시적이든 그렇지 않든, 번역은 무언가를 달라붙게 한다.

이 점에서 번역자는 소위 원시사회의 교역에서, 물건의 영(靈)을 불러내 그것을 받을 사람에게 인도하는 주술사와 비슷한 면이 있다. [36] [37]

4. 번역- 거리두기와 연대하기

앞서 말한 것처럼 조선에서 『월남망국사』의 번역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내셔널리즘을 추동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내셔널리즘은 인종주의나 지역주의, 심지어 제국주의와도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가령 판보이쩌우가 원조를 기대하면서 일본을 방문했을 때 그는 일본이 월남과 같은 문자권의 동일 인종이라는 사실에 기대를 걸었다. 아시아의 선도 국가로서 당연히 일본이 유럽 백인종 국가의 침략을 막아주어야 한다는 점도 환기시키려 했다. [38] [39] 위험이 적을 닮아가는 데 있다고 했던가. 제국주의 국가와 싸우기 위해 그가 동원한 이념들, 가령 민족주의, 인종주의, 지역주의 등은 제국주의를 떠받치고 있던 이념들이기도 했다.

제국주의 국가와 싸우면서 그것을 선망하고, 식민지를 동정하면서 그것과 거리두기를 시도하는 것은 조선의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월남망국사』와 거의 같은 시기에 번역된 『이십세기의 대참극 제국주의(二十世紀之大慘劇帝國主義)』(1908)에서 번역자 변영만의 다음 언급을 보자. 그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세계에서 벌이는 참극을 고발하고 제국주의에 맞서는 조선의 국민주의를 호소하면서도, 제국주의를 조선이 도달해야 할 과제처럼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마땅히 소리 높여 고함을 쳐야 하는 것은 아마도 국민주의일 것이다! 국민주의란 그것을 자세히 말한다면 바로 한민족의 생존주의다. 한민족의 생존주의가 날로 확장되면 다른 곳에서 온 제국주의를 어느 샌가 녹여 없애버릴 수 있을 것이며, 한민족의 생존주의가 극에 이르면 우리나라의 제국주의를 길러 발휘하게 될 것이다.” [40]

하지만 『월남망국사』가 조선에서 내셔널리즘의 영향 아래서만 읽혔던 것은 아니다. 번역자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월남망국사』 텍스트 자체는 내이션을 넘는 연대의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월남망국사』를 읽은 조선인들은 일본만이 아니라 프랑스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시했고, 월남에 대해서는 강한 연대의식을 드러냈다. 가령 수필가 김소운(金素雲)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에 이 책을 읽었는데 그 때의 생각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이 소남자[판보이쩌우]인 양 비분을 느꼈다. 마치 내가 불란서의 채찍 아래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것 같은 그런 아픔에 가슴이 떨렸다. 침략이 무엇이며, 민족의 자유란 어떤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가장 절실히, 구체적으로 내게 가르쳐 준 것이 이 얇다란 『월남망국사』 한 권이다. 그 속에 있는 「월남」이라는 글자를 무의식 중에 내 나라 이름으로 바꾸어서 읽을 수 있었다. 예술의 메카인 프랑스. 베를에느, 보오들레에르를 낳은 그런 프랑스인데도 월남에서는 지옥의 사자 같은 무서운 침략자였다. 그야 프랑스 뿐이랴. 강대국으로 일컫는 나라치고 남의 영토, 남의 민족을 겁탈하고 침략치 않은 나라가 있었던가? 찬연한 문화를 지녔던 잉카 제국, 아스테카 왕국을 일순에 멸망시킨 것은 스페인이요, 제 영토의 몇 십 배나 되는 식민지를 울궈 먹고 살진 것은 영국이다.” [41]

『월남망국사』를 읽은 조선인들은 천주교에 대해서도 반감을 공공연하게 표시했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프랑스의 파리외방전교회(Sociètèdes Missions Etrangères de Paris)가 관장하고 있었고, 실제로 상당수 조선인들이 천주교를 프랑스의 종교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2]

조선에서 프랑스와 천주교에 대한 강한 반감이 일자 천주교에서는 곧바로 『월남망국사』에 대한 비판을 시작했다. 조선의 천주교에서 발행하던 《경향신문(京鄕新聞)》은 모두 17회(1908. 4. 10 ~ 1908. 7. 31)에 걸쳐 이 책을 공격하는 글을 실었다. 그 주장은 아주 다양했다. 『월남망국사』의 내용이 지나치게 과장되었거나 거짓이며, 천주교를 견제하기 위해 개신교도들이 이 책을 퍼뜨리고 있다든가, 프랑스가 월남에 간 것은 월남이 자신의 문제로 구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또 어떤 글은 프랑스가 월남을 개화시켰다고 프랑스를 옹호하기도 하고, 다른 글은 프랑스의 식민통치가 너무 가혹하게 묘사되어 있어 조선에 대한 일본의 통치를 괜찮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43]

참고로 『월남망국사』가 조선에 번역되었을 즈음 판보이쩌우가 보인 행로는 자못 흥미롭다. 제국주의 일본을 월남 해방을 위한 원군으로 생각했던 판보이쩌우는 일본이 아시아를 억압하는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점차 깨닫는다. 그는 일본에 대한 선망을 버리고 아시아의 다른 약한 나라들과 협력하는 방향을 모색한다. 1907년에서 1908년 사이 그는 제국주의 일본에서 만난 중국인, 인도인, 월남인, 필리핀인, 조선인 등의 활동가들, 그리고 일본 내 사회주의 그룹과 동아동맹회(東亞同盟會)를 결성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 조직은 “자신들의 나라를 잃은 모든 인민들을 하나의 모임으로 조직해서 동시적인 혁명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44] 잃어버린 자들의 인터내셔널이었던 셈이다. 『월남망국사』의 번역에서 읽어낼 수 있는, 혹은 읽어내야 할 인터내셔널로서의 가능성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45]

5. 월남의 귀환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위하여

1960년대 월남전의 발발과 함께 월남은 한국에 다시 돌아온다. 당시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는 월남전 참전을 감행했다. 『월남망국사』가 번역된 지 반세기만이었고, 일본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이십 년만이었다. 제국주의 미국의 전쟁에 한국은 연인원 30만 명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병력을 파견했다. 겉으로는 한국전쟁의 참전에 대한 보은이니, 자유주의 수호니 하는 말을 내뱉었지만, 사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로서는 미국의 인정이 절실했고, 아울러 참전을 통해 경제적 군사적 실리를 챙길 속셈도 있었다.

1907년,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웠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강력한 내셔널리즘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월남망국사』를 번역하였다. 1965년, 한국 정부는, 자신이 자주 썼던 표현을 빌자면 ‘민족중흥의 계기를 만들기 위해, 제국주의 군대로서 월남에 들어갔다. 월남전이 미국과 한국의 패배로 끝나자, 한국 정부는 이상한 ‘월남망국론’을 퍼뜨렸다. ‘월남처럼 되지 말자!’ 1907년에 익숙했던 이 말이 1970년대에도 등장했다. 다만 이번에는 제국주의 프랑스가 공산주의 베트콩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반공의식, 안보의식이 약한 국민은 저렇게 망한다고. 이러한 ‘월남망국론’을 한국인들은 1970-80년대에 귀 따갑게 들었고, 최근에도 안보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소에서는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런데 1967년, 체 게바라는 「삼대륙회의 전하는 메시지(Message to the Tricontinental」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잊혀져버린 모든 인민들의 염원과 희망을 나타내는 베트남은 슬프게도 혼자이다. ... 중요한 것은 [미국의] 공격을 받은 베트남의 승리를 비는 데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운명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라틴아메리카에 촉구한다. “라틴아메리카는 이제야말로 혁명에 대한 명확한 임무를 가진 대륙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임무란 세계적으로 제2의, 제3의 베트남을 만드는 것이다.” [46]

이제 한국은 월남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한국은 지금까지도 6-70년대 한국에 들어왔던 ‘월남’을 충분히 번역하지 않고 있다. 1965-73년까지 사실상 미국의 용병으로서 월남전에 뛰어들어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그 군대가 돌아올 때 싣고 온 ‘월남’이라는 물음을 충분히 번역하지 않았다. 월남을 번역하는 일, 월남인들의 말과 생각, 경험을 번역하는 일은 한국이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이후 가졌던 ‘성스러운 피해자’ 이미지를 뒤트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스러운 번역의 실천만이 한국을 내셔널리즘과 제국주의에서 구원해줄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에도 월남은 새롭게 돌아오고 있다. 가령 2000년대 이후 농촌 곳곳에 붙어 있던 ‘베트남 처녀’라는 현수막의 형태로. 베트남과 국교를 수교한 1992년 이후 2000년까지 한국 남성과 결혼한 베트남 여성은 200명이 되지 않았으나, 2004년에는 2500명 가까이로 폭증했다. 월남은 ‘이주’ ‘노동자’ ‘여성’의 얼굴로 한국에 들어오고 있다. 한국 사회는 이들을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법적으로 귀화시키거나 본국으로 추방한다. 그러나 국제결혼을 통해 이주한 베트남 여성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국적을 가진 시민이면서 노동하는 노동자이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떠나온 나라에서도 가족과의 연결망을 구축하고 있는, 디아스포라적인 정체성을 담고 있다. [47]

그러나 바로 이 ‘월남’은 지금 한국에서 ‘연변’이고, ‘네팔’이고, ‘방글라데시’이며, ‘필리핀’이고 ‘버마’이다. 한국의 국적을 갖지 못한, 심지어 가질 생각도 없는, 그렇다고 자신의 출신지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는, 소위 ‘불법체류자’로 불리는 수십만 명의 이주자들이 존재한다. 이 표상 불가능한 존재들, 이 통약 불가능한 존재들, 인터내셔널의 과제도 희망도 모두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번역이 통약 불가능성의 장소에서 관계를 만드는 제작적(poetic) 실천 ” [48]

[1]S. Naoki, Translation & Subjectivity, 후지이 다케시 옮김, 『번역과 주체』, 이산, 2005, 65쪽.
[2]황호덕, 『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 -타자, 교통, 번역, 에크리튀르』, 소명출판, 2005, 364쪽.
[3]조선 최초의 근대 유학생이었던 유길준이 쓴 『서유견문』은 좋은 예이다. 이 책은 일본과 미국을 유학하고 귀국길에 유럽을 들렸던 유길준이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소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는 아주 ‘의식적으로’ ‘한문’이 아닌 ‘국한문체’를 사용하고 있다. 그가 과거 조선의 언어생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한자’를 ‘국문’에서 배제하게 된 까닭은 서양의 번역, 즉 서양과의 비교를 통해서이다. 그는 나라들마다 말에 맞는 글을 가지고 있는데 조선의 언어생활을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 오염의 원인으로 ‘중국과 함께 쓰는 한자’를 지목했다. 즉 서양의 언어생활을 보면서 한글을 ‘국문’으로 발견한 셈이다. (유길준, 허경진 옮김, 『서유견문 -조선 지식인 유길준, 서양을 번역하다』, 서해문집, 2004)
[4]조선 후기 대표적 유학자 중의 한 사람인 황현은 ‘국한문체’ 사용이 일본의 문법을 본받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조선의 전통적 글쓰기 체제는 ‘진서(眞書)’라고 불리는 ‘화문(華文)’과 ‘언문(諺文)’이라 불리는 훈민정음으로 이루어져 있어 ‘진언’이라 불렸는데, 갑오경장(1894) 이후 ‘진서’를 ‘한문’으로, ‘언문’을 ‘국문’으로 되면서, ‘국한문’이 조선말이 되었다고 말한다.(黃玹, 『梅泉野錄』, 김준 옮김, 『매천야록』, 교문사, 1994, 89쪽 참조. 이에 대한 해설로는 황호덕, 위의 책, 367-368쪽 참조.)
[5]S. Naoki, 위의 책, 62쪽.
[6]W. Benjamin, “Die Aufgabe des Übersetzers”, 최성만 옮김, 「번역자의 과제」,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 번역자의 과제 외』, 발터벤야민 선집6, 도서출판 길, 2008, 139쪽.
[7]E.J. Sieyès, Qu'est-ce que le Tier Etat?, 박인수 옮김,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책세상, 2009. 22-24쪽.
[8]E.J. Sieyès, 위의 책, 23쪽.
[9]덧붙이자면 시에예스는 외국인만이 아니라 여성, 부랑자, 거지 등에 대해서도 인민의 대표로서의 피선출권을 부인했다.
[10]E.J. Sieyès, 위의 책, 44-45쪽.
[11]K. Marx, The Civil War in France, 임지현․이종훈 옮김, 「프랑스 내전」, 『프랑스혁명사 3부작』, 소나무, 1991, 353쪽.
[12]재일조선인이 일본과 한국 사이에서 겪는 동화의 폭력에 대해서는 崔真碩, 「朴致祐における暴力の予感 「東亜協同体論の一省察」 を中心に」, 『現代思想』, 靑土社, 2003年 3月号 참조. 재일조선인의 사라짐은 그에게 있어 그 존재가 품고 있는 식민지 역사에 대한 기억의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는 식민지 시기 동화 폭력의 상징인 ‘내선일체(內鮮一體, Japanese-Chosen Unification)’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아니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증언하고 그것과 싸우기 위해, 내셔널리스트라는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를 지켜내고자 한다.
[13]최근 우리는 18년을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네팔 출신의 미등록이주노동자와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한국 여성과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그럼에도 한국의 국적 신청을 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는 그렇다고 네팔로 돌아갈 생각도 갖고 있지 않다. 정부가 이주노동자들에게 ‘난민’의 지위를 인정해서, 국적 취득 없이도 생활을 해나갈 수 있게 해줄 때까지 계속해서 싸워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14]J. Rancière, “Monde contemporain et formes de subjectivation politique”, (중앙대학교 강연자료, 2008/12/4).
[15]가령 자크 데리다의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대한 다음 언급은 이 글의 문제의식과 통하는 면이 있다. “그것은 신분과 직위 그리고 호칭이 없는, 은밀하지는 않지만 공개적인 것이라고 하기도 어려우며, 계약을 맺고 있지 않고, ‘이음매가 어긋난 채(out of joint)’, 조정 없이, 당과 조국, 민족공동체 없이(모든 민족적인 규정에 앞서는, 그것을 관통하고 넘어서는 인터내셔널), 공동 시민성 없이, 어떤 공동적 소속 없이 이루어지는 비동시적인 연대이다.”(J. Derrida, Spectres de Marx, 진태원 옮김,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제이북스, 2007, 173쪽).
[16]량치차오는 일본으로 건너온 후 《淸議報》(1898.11.11~1901.11.21), 《新民叢報》(1902.1~1907.7), 《新小說》(1902.10~1905.9) 등을 간행했다. 그의 『음빙실문집』은 이들 출판물들에 실었던 글을 중국 『時務報』에 실었던 글과 합쳐 간행한 것이다(최박광, 「『월남망국사』와 동아시아 지식인들」, 『인문과학』, 제36집,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5, 9쪽).
[17]판보이쩌우가 일본에 관심을 갖게 된 다양한 배경에 대해서는 M. Shiraishi, “Phan Boi Chau and Japan”, South East Asian Studies, Vol. 13, No. 3, December, 1975 참조.
[18]배양수, 「판보이쩌우와 동유운동의 역사적 의미」, 『외대논총』, 24집. 부산외국어대, 6쪽.
[19]정환국, 「근대계몽기 역사전기물 번역에 대하여」, 대동문화연구ࡕ, 제48집,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4, 10쪽.
[20]현채는 조선의 한어(漢語)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그 자신도 한어역과(韓語 譯科)에 급제한 조선 후기 대표적인 번역자이다. 그는 1894년에 부산항서기관(釜山港書記官), 외무아문교섭주사(外務衙門交涉主事),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번역관(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飜譯官) 등의 관직을 거쳤고, 1896년부터는 12년간 학부의 주사(主事)로 있으면서 많은 번역물을 내놓았으나, 『월남망국사』 등의 번역과 관련해서 해직되었다. 그는 한어역관으로서 중국어에 능통했고, 일본과의 거래가 활발한 부산항에서 근무한 경력을 볼 때 일본어에도 어느 정도 능통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아들 현공렴과 함께 소위 ‘현채가(玄采家)’를 이루며 엄청난 양의 저서 및 번역서를 펴냈다. 정은경의 조사에 따르면 ‘현채가’가 1898년부터 1926년까지 펴낸 책(저서, 역서, 발행서)은 모두 318종이다. (정은경, 「개화기 현채가의 저•역술 및 발행서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 서지학회, 1997.)
[21]「越南提督劉永福檄文」은 중국인이면서 월남 장수로 활약한 유영복이 월남인의 반불활동을 독려하는 격문이었다.
[22]정환국, 「근대계몽기 역사전기물 번역에 대하여」, 『대동문화연구』, 제48집, 2004, 15쪽 참조,
[23]이종미, 「『월남망국사』와 국내 번역본 비교 연구」, 『中國人文科學』, 第34輯, 중국인문학회, 2006.
[24]가령 주시경본을 펴낸 박문서관의 발행인 노익형이 쓴 서문의 다음 부분을 보라. “월남이 망 긔는 우리의게 극히 경계될만일이라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 크고 깁흔 실을 라 우리가 다엇더케여야 이환란속에셔 명을보젼지 각이 나리라 이럼으로 한문을 모르는이들도 이일을 다 보게랴고 우리 셔관에셔 이치 슌국문으로 번역여 젼파노라.”(주시경 역, 『월남망국사』, 한국개화기문학총서II, 『역사․전기소설』 제5권, 서울 아세아문화사, 1979, 103쪽.)
[25]최기영, 「국역 『월남망국사』에 관한 일고찰」, 『동아연구』, 제6집, 서강대동아연구소, 1985. 495쪽.
[26]《대한매일신보》, 1907. 2. 21. 잡보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
[27]최기영, 위의 논문, 499쪽.
[28]당시 발표된 금서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越南亡國史』(현채본), 『월남망국사』(이상익본), 『二十世紀朝鮮論』(김대희), 『幼年必讀』(현채), 『幼年必讀釋義』(현채), 『中等敎科東國史略』(현채), 『금수회의록』(안국선), 『우순소리』(윤치호) 등의 8종이었다.
[29]최박광, 「『월남망국사』와 동아시아 지식인들」, 『인문과학』, 제36집, 성균관대인문과학연구소, 2005, 16쪽.
[30]1939년 말 임화가 《조선일보》에 쓴 「조선문학사」를 보면, 여전히 『월남망국사』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임화, 「조선문학사」, 『한국문학사연구총서』1, 삼문사, 490쪽, 최기영, 위의 논문, 505쪽에서 재인용). 실제로 해방 이후인 1949년에도 김진성이 『월남망국사』 번역본(홍문서관)을 출간한 바 있다.
[31]유인선, 「판보이쩌우 -방황하는 베트남 초기 민족주의자」, 『역사교육』, 제90집, 역사교육연구회, 2004. 192쪽.
[32]M. Shiraishi, 위의 논문, pp. 432-433.
[33]『월남망국사』의 서울아세아문화사본(1979)을 기준으로 볼 때, 현채본의 경우 17쪽 “向者日本이...”에서 18쪽 끝부분, “... 차소위조선명망사라.” 까지다. 주시경본의 경우, 117쪽 끝부분 “일본이 조선을 도모지가 ...”에서 119쪽 중간의 “...이것이 죠션의 멸긔라.”까지다.
[34]내용을 일부분 수정한 곳도 있다. 보부상들의 일본 반대 행위를 지적하며 량치차오는 “이런 구구한 적개심도 끝내는 망한을 구제할 수 없으리니”라고 썼는데, 현채는 이 부분을 “어찌 한인을 책하겠는가”라고 바꾸었다.(정환국, 위의 논문, 16쪽.)
[35]판보이쩌우는 서적이 출간되자 50부를 월남에 유포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책으로 다시 복사되었고, 월남어를 로마자화한 국어(Quoc Ngu)로도 부분적 번역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일본에 유학중인 학생들에게 전해졌다.(최기영, 「한말 천주교회와 『월남망국사』」, 『아세아문화』, 한림대아세아문화연구소, 1996, 395쪽.)
[36]M. Mauss, 이상률 옮김, 『증여론』, 한길사, 2002, 107쪽.
[37]M. Mauss, 이상률 옮김, 『증여론』, 한길사, 2002, 102쪽, 각주30. “북서부 아메리카의 문장이 그려진 동판과 사모아 섬의 돗자리는 포틀래치 때마다, 즉 교환할 때마다 그 가치가 커진다.”
[38]“현재의 열강을 보면 우리와 동문(同文), 동종(同種)이 아니라면 어떤 나라라도 우리는 원조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은 이미 우리나라를 프랑스에 양보했을 뿐만 아니라 세력이 쇠약해져서 자신을 구하는 일도 끝나지 않았다. 오직 일본만이 황인종인데다가 선진국이다. 러시아를 이긴 이후 날로 야심을 드러내고 있으나 우리가 일본에 가서 설득한다면 당연히 우리를 원조할 것이다.”(판보이쩌우, 『自判』, 배양수, 위의 논문, 10쪽에서 재인용)
[39]M. Shiraishi, 위의 논문, 434쪽.
[40]변영만, 「自序」, 『이십세기지대참극제국주의』,(김인택, 「근대초기 ‘식민’, ‘제국주의’ 관련 번역서 연구」, 성균관대 동아시아협동과정 석사논문, 2004, 124쪽 재인용.)
[41]김소운, 『하늘 끝에 살아도』, 최박광, 위의 논문, 15쪽에서 재인용.
[42]최기영, 「한말 천주교회와 『월남망국사』」, 『아세아문화』, 한림대아세아문화연구소, 1996, 397쪽.
[43]최기영, 위의 논문 참조.
[44]Phan Boi Chau, ࡔ自判ࡕ, M. Shiraishi, 위의 논문, p. 439에서 재인용.
[45]당시 이 모임에 참여했던 일본인 사회주의자들 그룹은 대부분 코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의 ‘직접행동파(Direct Action)’였다고 한다. 코토쿠 슈스이는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을 일본에 소개하고 번역한 인물이기도 했는데, 그는 러일전쟁이 임박했을 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의 적은 러시아 사람이 아니다. ... 애국주의와 군국주의가 당신들과 우리들의 공통된 적이다. 세계 만국의 사회주의자들의 공통된 적이다. 당신들과 우리와 전세계의 사회주의자는 그 공통된 적을 향해서 용감한 전투를 해야한다.”(《平民新聞》, 1904. 3. 13. 김석근, 「코토쿠 슈스이의 무정부주의」, 『동양정치사상사』, 7권, 1호,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7, 52쪽 재인용.)
[46]Che Guevara, “Message to the Tricontinental,” http://www.marxists.org/archive/guevara/1967/04/16.htm
[47]김현미, 「국제결혼의 전 지구적 젠더 정치학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경제와 사회』, 통권 70호, 2006.
[48]S. Naoki, Translation & Subjectivity, 후지이 다케시 옮김, 『번역과 주체』, 이산, 2005, 62쪽.

Kommentar

Zuerst möchte ich mich bei den Veranstaltern dieser Tagung herzlich für die ehrenvolle Gelegenheit bedanken, dem internationalen Publikum die anregenden Gedanken der beiden koreanischen Autoren, Herrn Dr. Goh und Frau Dr. Oh, in ihrem Beitrag International vor National vorstellen zu dürfen. Die Lektüre dieses Beitrags und die Vorbereitung dieses Kommentars waren für mich Anlaß, mir Gedanken darüber zu machen, wie sich der intellektuelle Horizont in Korea im letzten Jahrzehnt verändert und erweitert hat. Für mich als akademischen Heimkehrer, der sich nach einer mehr als zehnjährigen intensiven innerlichen Verdeutschung gerade um die Wieder-Koreanisierung bemüht, ist die Aufgabe, über diesen Beitrag zu berichten und ihn zu kommentieren, besonders wertvoll. Hier sei auch den beiden hier anwesenden Autoren herzlich gedankt.

Ich habe den Beitrag von Herrn Dr. Goh und Frau Dr. Oh mit großem Interesse, manchmal mit Sympathie, aber oft auch mit Vorbehalt gelesen. Damit kündige ich bereits an, dass mein Bericht nicht nur eine Zusammenfassung, sondern auch einige Kritik enthält. Da die beiden Autoren den Begriffen »Nation« und »Vaterland« keine besondere Sympathie entgegenzubringen scheinen, hoffe ich auf ihr Verständnis dafür, dass ich in meinem Bericht und Kommentar auf jeglichen Nationalismus und Patriotismus verzichte und die trockene Art von Kritik zu üben versuche, die hierzulande üblich ist.

Das gesamte Argument der Autoren läßt sich auf eine Grundthese zurückführen. Es ist die folgende: Der Akt der literarischen Übersetzung hinterfrage und zersetze die Nation, oder zumindest habe er eine allgemeine Tendenz bzw. eine starke Möglichkeit dazu. Die Autoren glauben, dass diese Tendenz oder Möglichkeit besonders bei einer Reihe von koreanischen Übersetzungen des Buches Vietnams Ruin zur Erscheinung kam, die Liang Qichao auf der Grundlage seines Gesprächs mit Phan Boi Chau im Jahr 1905 in Yokohama, Japan, publizierte. Den Autoren zufolge haben sich die Übersetzungen dieses Werkes beim koreanischen Publikum dahingehend ausgewirkt, daß dieses Publikum die Möglichkeit einer Gemeinschaft zu denken oder mindestens zu fühlen begann, die über die enge Grenze des Nationalstaates der Koreaner hinausging.

Das ist eine überraschende These und zwar gerade deswegen, weil Vietnams Ruin neben einer starken Kritik am französischen Kolonialismus eine sozialdarwinistisch begründete stark nationalistische Message beinhaltete, nämlich daß die asiatischen Völker angesichts der Invasion des westlichen Kolonialismus für ihre nationale Unabhängigkeit kämpfen und daher für ihre eigenen Macht sorgen müssten. Es ist historisch zu belegen, dass die Übersetzungen sowohl von den Übersetzern als auch von der koreanischen Leserschaft nicht anders verstanden wurden. So inspirierte diese Übersetzung zum Beispiel die landesweite Bewegung, die staatlichen Schulden durch freiwillige Beiträge der Bürger zu bezahlen - eine nationalistisch orientierte Bewegung. Umso seltsamer, ja fast ironisch, klingt also die These der beiden koreanischen Wissenschaftler, dass sich gerade bei den Übersetzungen von Vietnams Ruin eine entgegengesetzte Tendenz zeigte, ja eine Vision, die sich einer solchen nationalistischen Vision entgegengesetzte, ja sie sogar potential zerstören konnte.

Bevor wir diese ambitionierte These noch genauer betrachten, scheint mir es erforderlich, daß wir uns über einige Grundinformationen verständigen: Der Autor von Vietnams Ruin , Liang Qichao (1873-1929), war ein chinesischer Gelehrter, Journalist, Philosoph und Reformer am Ende der Qing-Dynastie (1644-1911). Als Schüler von Kang Youwei, einem berühmten chinesischen Gelehrten und Reformer, wirkte er durch zahlreiche Artikel und Bücher über China hinaus. Sein Einfluss auf die koreanischen Intellektuellen war seit 1897 allgemein zu bemerken. Den koreanischen Denkern, die die Gefährdung ihres Landes durch den westlichen und vor allem (seit 1905) japanischen Kolonialismus akut wahrnahmen und immer stärker nach der Modernisierung begehrten, boten Liangs Werke nicht zuletzt wegen ihres inhaltlichen und stilistischen Reichtums einen Zugang zum westlichen Wissen an.

Vietnams Ruin ist auf der Basis des Gesprächs verfasst, das Liang mit Phan Boi Chau (1867-1940), einem Pionier des modernen vietnamesischen Nationalismus, in Yokohama geführt hat. Das Werk erklärt, wie Vietnam das Objekt des französischen Kolonialismus wurde, wie die Vietnamesen dagegen protestierten, wie grausam die Franzosen Vietnam unterdrückten und was Vietnams Zukunft sein würde. Die Popularität dieses Werkes unter den koreanischen Intellektuellen verdankte sich dem historischen Umstand, dass Korea nach dem Korea-Japan-Protektoratsabkommen (1905) dem japanischen Kolonialismus wehrlos augeliefert war. Es bedarf keiner besonderen Erklärung, dass die Geschichte der vietnamesischen Nationaltragödie beim koreanischen Publikum auf große Sympathie stieß. Vietnams Ruin wurde bereits binnen zwei Jahren nach seiner Publikation drei Male ins Koreanisch übersetzt (November 1906, November 1907, Dezember 907). Die Bedeutung des Werkes in Korea läßt sich aber auch indirekt daran belegen, dass die pro-japanische Regierung dieses Werk bald verbot.

Herr Dr. Goh und Frau Dr. Oh weisen besonders auf die Herausbildung einer koreanischen Sympathie für das Schicksal Vietnams hin. Ein besonders interessantes und von den Autoren ausführlich beschriebenes Beispiel dafür ist die Interpolation, die einer der Übersetzer unternommen hat. Dieser Mann namens Hyunchae fügte in seine Übersetzung einen Teil ein, in dem Liang darüber klagte, was sich in den letzten Jahren in Korea abgespielt hatte: Also wie der koreanische Staat seine Unabhängigkeit und Souveränität verlor und die Koreaner ihre Grundrechte an die japanischen Kolonialherren verloren. Dieser Teil stammte zwar von Liang, aber nicht aus dem Text vom Vietnams Ruin , sondern aus einem anderen Werk, Die Geschichte des Ruins von Chosun . Diese Interpolation zeigt, dass der koreanische Übersetzer und das koreanische Publikum im Schicksal der Vietnamesen auch die Tragödie ihrer eigenen Nation gesehen haben. Die daran zu erkennende elementare Solidarität des koreanischen Volkes mit dem leidenden vietnamesischen nennen Herr Dr. Goh und Frau Dr. Oh die »anti-imperialistische Internationale.«

Der Hauptteil des Beitrags von Herrn Dr. Goh und Frau Dr. Oh besteht darin, diesen und andere leider nicht näher beschriebene Momente der Sympathiebildung unter den fremden Völkern zu interpretieren und damit ihre Interpretation theoretisch zu unterfüttern. Sie behaupten, dass sich die anti-imperialistische Internationale nicht auf die Ebene des Nationalismus reduzieren lasse, d.h., um es in der Sprache unserer beiden koreanischen Autoren zu sagen, daß die »anti-imperialistische Internationale« keineswegs eine Solidarität der Nationen ist, sondern auf die Dekonstruktion und Destruktion der Nationen hinausläuft. Diese Internationale gehöre in den Bereich einer Gemeinschaft, wie sie Karl Marx sich vorstellte, als er aufrief »Proletarier aller Länder, vereinigt euch!«, und die sich in der Geschichte hier und da zeigte, wie in der Pariser Kommune, wo vor der Barrikade die nationale Unterschiede ignoriert wurden.

Genau diese Behauptung betrifft mein erster Zwischenruf: Die Autoren scheinen mir die pro-vietnamesische Solidarität unter dem koreanischen Publikum zu überinterpretieren. Denn die Basis dieser Sympathie ist eben das Begehren nach der starken koreanischen Nation und dem mächtigen koreanischen Staat. Eine nicht-nationale Internationale kann aber nur von denjenigen akzeptiert und unterstützt werden, die eben nicht-national sind. Als Marx die internationale Solidarität der Proletarier forderte, war ihm bewußt, dass nur diejenigen Arbeiter diese Aufgabe erfüllen konnten, die verstanden, dass die nationalen Grenzen überhaupt nicht dem Interesse der Proletarier dienten. Aber wo gab es ein solches anti-nationalistisch gesinntes Publikum im ersten Jahrzehnt des letzten Jahrhunderts in Korea? M. E existierte ein solches Publikum in den damaligen koreanischen Verhältnissen noch nicht (wahrscheinlich mit Ausnahme der kleinen Nische der Kommunisten). Unsere beiden koreanischen Autoren schweigen leider von dieser Kernfrage.

Hier sei mir erlaubt, meine große Sympathie für die kosmopolitische Vision der Autoren zu bekennen. Gleichzeitig finde ich in ihrem Beitrag eine Tendenz dazu, den historischen Tatbestand zu ignorieren bzw. dahingehend zu überziehen, dass er ihrer Hypothese passt. Ein typisches Beispiel dafür ist ihre Diskussion über das ostasiatische Bündniss, das Phan Boi Chau zwischen 1907-1908 mit anderen politischen Aktivisten aus China, Indien, den Philippinen, Korea und mit den japanischen Kommunisten gegründet hatte. Dieses Bündnis wird manchmal das Bündnis der ostasiatischen Staatenlosen genannt. Dies ist verständlich, weil die Mitglieder tatsächlich ihren Staat an den westlichen und japanischen Kolonialismus verloren haben. Unsere Autoren legen aber den Begriff der ‚Staatenlosen‘ in diesem Titel ohne weiteren Beleg im Sinne von ‚Staatenlos-Sein-Wollenden‘ aus und behaupten, in diesem Bündnis ein Modell oder ein Beispiel der nicht-nationalen Internationale sehen zu können. Mir scheint aber diese Behauptung sehr gewagt und erheblich begründungsbedürftig zu sein, denn ich finde in der darauf folgenden Diskussion keine Begründung dafür, die im Bündnis versammelten staatenlosen, aber daher umso mehr staatsbegehrenden Menschen so kosmopolitisch zu schildern.

Nun wende ich mich dem theoretischen Rahmen des Beitrags. Ihrem Beitrag liegt eine theoretische Überlegung bzw. Hypothese zum Akt der Übersetzung zugrunde. Die Autoren behaupten, dass der Übersetzungsakt für jede Gemeinschaft eine identitätsstörende bzw. identitätszerstörende Auswirkung hat. Denn der menschlichen Sprache wohne etwas Universales und Reines inne, und die einzelnen Nationalsprachen, wie das Deutsche, das Französische, oder das Koreanische, könnten dieses Universale und Reine nur beschränkt und imperfekt ausdrücken. Insofern die Übersetzung eine Arbeit an diesem Universalen und Reinen ist, mache sie den Mitgliedern einer Gemeinschaft diese Beschränkung bzw. Unfähigkeit ihrer Sprache bewusst.

Auf diese sprachtheoretische Überlegung, die im Beitrag abgesehen von einem kurz eingeführten Gedanken Walter Benjamins nicht näher begründet wird, kann hier nicht eingegangen werden. Ich lasse die Frage offen, inwieweit eine solche Annahme eines Universalen und Reinen angesichts der Erkenntnisse der modernen Linguistik noch sinnvoll sein kann. Interessant ist aber die weitere Folgerung von Herrn Dr. Goh und Frau Dr. Oh aus dieser theoretischen Annahme: Weil die Übersetzung die Unmöglichkeit der individuellen sprachlichen Gemeinschaften bewusst mache, führe sie uns die »Unmöglichkeit einer Nation« vor Augen, und richte schließlich unseren Blick auf eine universale und reine Gemeinschaft. Es erübrigt sich hier zu erwähnen, dass die oben vorgestellte Solidarisierung der Koreaner mit den Vietnamesen für die Autoren eben einen solchen Fall darstellt.

Jeder aufmerksame Leser wird sich aber an dieser Stelle sofort fragen, wie weit es sinnvoll und logisch sein kann, von der Benjaminschen These von der Beschränktheit einer nationalen Sprache oder der Unfähigkeit einer diese Sprache sprechenden Gemeinschaft, das Universale und Reine auszudrücken, die »Unmöglichkeit nationaler Sprachen und Gemeinschaften« zu folgern. Es ist vor allem unklar, was die Autoren unter der »Unmöglichkeit nationaler Sprachen und Gemeinschaften« verstehen wollen. Wollen sie sagen, dass eine nationale Sprache oder Gemeinschaft eben deswegen zum Tod verdammt ist, weil sie das Universale und Reine weder erfassen noch realisieren kann? Oder wollen sie sagen, dass eine nationale Sprache oder Gemeinschaft eben aus demselben Grund illegitim ist? In jedem Fall klingt diese Behauptung unserer Autoren nicht sehr überzeugend. Denn die Tatsache, dass ein Wesen zu einer bestimmten Aktion nur eine beschränkte Fähigkeit oder gar keine Fähigkeit besitzt, bedeutet keineswegs, dass es entweder unfähig zum Fortbestand oder illegitim ist. Ich nenne nur ein Beispiel: In der Tradition des europäischen Christentums waren sich die Menschen der Endlichkeit ihrer Existenz stets bewusst. Viele haben während des Mittelalters und teilweise immer noch ihre Unfähigkeit bekannt, den endlosen Gott und seine grenzenlose Weisheit mit dem menschlichen Intellekt zu erfassen und mit ihrer stotternden Zunge angemessen darzustellen. Man darf aber daraus nicht überschnell schließen, dass eben dieses Bewusstsein die menschliche Existenz und die menschliche Sprache »unmöglich« erscheinen ließ. Die negative Theologie ist ja nichts anderes als eine Bemühung, sich innerhalb dieser Beschränktheit und Unfähigkeit doch Gott anzunähern.

Die Lektüre des Beitrags von Herrn Dr. Goh und Frau Dr. Oh wird erschwert, weil die Relevanz dieser in sich noch unvollkommenen theoretischen Überlegung für die Analyse des zur Diskussion stehenden Falls der koreanischen Übersetzungen von Vietnams Ruin nicht ganz deutlich ist. Denn die Solidarität des koreanischen Volkes entstand keineswegs aus einer Erfahrung der Unmöglichkeit der Übersetzung eines irgendwie generierten Universalen und Reinen. Das koreanische Volk konnte aufgrund seiner eigenen Erfahrung das Leiden der Vietnamesen verstehen und sich in ihre Lage versetzen. Was die beiden Völker verband, war nicht die Unfähigkeit, sondern gerade die Fähigkeit der koreanischen Nationalsprache, ihren Sprechern die fremden Erfahrungen zu vermitteln. Die koreanische Gesellschaft erwies sich als dazu fähig, nicht unfähig, sich die fremden Erfahrungen zueigen zu machen. Auch in Zukunft wird eine internationale Solidarität nicht anders möglich sein. Auch sie wird dadurch entstehen, dass die einzelnen nationalen Gemeinschaften sich gegenseitig verstehen, ihre Erfahrungen und Visionen anerkennen, sie partiell teilen und sich gemeinsam über einen institutionellen Rahmen für die Förderung einer Solidarität Gedanken machen. Die ‚Rettung aus dem Nationalismus und dem Imperialismus‘, welche die beiden koreanischen Autoren so sehr zu begehren scheinen, werden nicht anders möglich sein.

Vielen Dank!